이영찬의 자전적 장편 에세이소설
이영찬의 자전적 장편 에세이소설
  • 정주홍 기자
  • 승인 2009.12.10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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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갈 수 없는 날들 ③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때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이 싫어질 때, 그 때 절망의 나락에서 헤메다 언뜻 정신을 차려보면 늘 아버지는 내 곁에 계셨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렇게.

나는 늘 외로웠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언제나 말없이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걸 견딜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약하고 외로운 인간이다. 그러니까 혼자 있는 것보다는 누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위안이 된다. 그런데,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가끔 성가신 일이 생기기도 한다. 언제나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도 성가시지 않고, 밑질 것도 없는 주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사람의 나이가 40을 넘으면 노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이가 60이 넘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남자는 대개 70세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나는 앞으로 10년도 살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봤을 때 우리 집안 남자들은 그리 오래 사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늙어서까지 추하게 오래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음에 대해서 일찍부터 많이 생각해 왔다.
국토개발연구원에서 일할 때, 우리나라에서 내가 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존재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기의 연구 분야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고 했을 때에도 나는 죽음과 관련된 분야인 ‘묘지문제’를 택했었다.
나는 죽음에 대하여 미리 대비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하게 받아드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지금도 그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인도의 마더로 불린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평온하게 그리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취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인생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언제든지 불쑥 내게 찾아올 죽음, 그 죽음을 남의 것이 아니고 내 것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두는 것이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평소의 내 생각이었다.


죽음을 수용하는 첫걸음은 ‘왜 나만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왜 나라고 죽으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에로 옮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인생의 성장단계에 있어서 마지막 과정이다.
티베트의 바르도(죽음과 재생 사이의 중간단계)가 주는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성취의 순간인 것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에서도 역시 죽음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영광된 순간일 뿐이다.
나는 죽기 전에 한 가지 꿈이 있다.
이 나이에 뭐 거창한 보랏빛 꿈을 꾸는 건 아니고.다만, 객사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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