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형의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3
조지형의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3
  • 송영숙
  • 승인 2016.06.14 18:0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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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야기 – 미운 오리 새끼(우리는 각자 다르며 또 그만큼 각자 소중하다)

줄거리 : 미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주변 오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상처를 받은 새끼 오리는 혼자 집을 떠나고,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고양이와 닭의 괴롭힘에 못 이겨 결국 또 혼자 떠난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우연히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못생긴 오리인줄만 알았던 새끼 오리는 다름 아닌 아름다운 백조였다. 이후,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 무리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행복하게 산다.

미운 오리 새끼의 교훈은 ‘미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저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다른 오리들과 행복하게 잘 살았어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저 결론 덕분에 이야기 초반의 갈등은 사회 문제가 아닌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어 또 다른 갈등의 악순환을 유지하고 있다. 외모에 대한 가치판단이 전혀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미운 오리 새끼를 따돌렸던 오리들이 반성하고 후회할 만한 개연성도 전혀 보이지 않기에 차별하지 말자는 교훈을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겉모습을 보지 말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는 교훈도 있던데 백조가 아름답다는 수식을 한 순간 의미가 없는 교훈이다. 또한 실상 외면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라는 것처럼 무책임하고 어려운 것이 어디 있는가.

‘다름’에 대한 인정은 민주주의사회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그리고 그 ‘다름’에 대한 허용 기준은 도덕, 윤리, 법 그리고 대화 등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서 퀴어 문화 축제(동성애 축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것은 종교 및 정서적인 문제고 ‘위법’이라는 것은 법적인 문제다. 동성애 자체가 위법은 아니다. 따라서 종교 및 정서적 문제로 판단해야 한다. 최근 한 결혼업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 약 50% 이상이 동성 결혼을 찬성했으니 대한민국 전체가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도 보기 어렵다. 다만 최근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서 ‘퀴어 문화 축제 어떻게 생각하세요?’란 질문에 반대가 96%가 나왔지만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동성애 문제는 적어도 ‘대화’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대화는 각자의 언어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공통의 언어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는 상대방의 언어로 해야 한다. 상대방의 언어란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식 체계 내에서 사고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통의 일반적인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의 “뭐가 미안한데?”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나아가 설득은 대화를 전제로 한다. 가장 최악의 설득 중 하나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을 끌어 들여 상대를 짓밟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상대가 듣건 말건 자기주장만을 펼치는 것이다. 이번 퀴어 문화 축제는 이런 최악의 대화 방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기독교인 등은 무조건적으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며 동성애자들을 비난 했으며, 동성애자들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축제를 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집단은 한국사회에 갈등만을 야기한 채 본인들의 본래의 목적은 망각했던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한다. 대표적인 구절이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 20:13)’라는 구절이다. 대부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 있다. 물론 신약에도 있긴 하다(고린도전서 등). 하지만 신약에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사랑하라)에 따라 많은 부분 모순이 생기면서 구약처럼 강하게 어필되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어 놓은 복음서(마태, 요한 등)에는 거의 동성애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마태복음 8장의 내용을 놓고 그것이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어 보인다(이 부분이 사실 재밌는데 지면상 생략한다. 궁금한 사람은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여하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이 논의가 과연 동성애자들, 나아가 비 기독교인에게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없다. 성경을 통해 대화하는 방식은 기독교인의 방식일 뿐이기에 전혀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필자가 성경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를 포함한 비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통한 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퀴어 문화 축제는 어떠했는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적인 한국의 정서마저 무시했다(여기서 한국의 정서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개념이다). 필자가 인식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왜 옷을 다 벗어야 하고 음담패설이 난무해야 하며 기본적인 공공질서를 무시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정말 동성애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비 동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서로 아름답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방식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한국일보의 설문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래도 스스로 많이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필자가 보기에도 조금은 불편했는데(실상 불편하다는 필자의 인식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만일 노이즈 마케팅이 목적이었다면 크게 착각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 개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는 ‘다름’이며 이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대화를 통해서 ‘특수성’이 아닌 ‘다양성’이 된다.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하는 허용 경계는 결국 각자의 ‘개방성’에 있으며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를 성숙시키는 원동력이다.

모두들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그저 ‘다른 오리 새끼’다. 하지만 자신은 다른 오리 새끼라며 다른 오리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 역행하는 것이다. 애견센터 앞에서 보신탕을 먹지도 말며 보신탕집 앞에서 그들을 매도하지도 말자. 우리는 각자 다르며 또 그만큼 각자 소중하다.

조지형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전)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도서출판 큰글사랑 기획실장

주식회사 디엠에코 이사

『어쩌면당신은관심없는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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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형 2016-06-20 11:36:17
항상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KREMS 2016-06-15 18:13:59
공감이 갑니다. 미운오리가 아닌 다른오리, 각자가 다르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