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촛불의 승리 그리고 진보와 보수)
열두 번째 이야기 –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촛불의 승리 그리고 진보와 보수)
  • 송영숙
  • 승인 2016.12.23 18: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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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이야기 –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촛불의 승리 그리고 진보와 보수)

 

줄거리 : 쥐가 고양이에게 자주 잡히자 견디다 못한 쥐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쥐들은 서로 지혜를 짜내어 고양이가 오는 것을 미리 알아내는 방법을 궁리하였으나, 크게 신통한 의견은 없었다. 그때 조그만 새앙쥐 한 마리가 좋은 생각이 있다면서 나섰다. 그 묘안은 고양이 목에다 방울을 달아 놓으면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날 것이므로, 자기들이 미리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쥐들은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그때 한 구석에 앉아 있던 늙은 쥐가 “누가 고양이에게 가서 그 목에다 방울을 달 것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는 쥐는 없었다.

 

쥐(국민)들은 지금까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 대표(국회의원)를 선출했다. 하지만 대표들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쥐들은 결정했다. ‘방울’을 다 함께 직접 달자고. 그것이 백만 촛불 집회다. 국민들은 함께 뭉쳐 행동할 때 비로소 바꿀 수 있다는 큰 경험을 했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큰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매번 국민들이 직접 방울을 달러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방울을 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한 시기이다. 정치구조는 재편될 것이고 또 다른 정치 권력 다툼이 있을 것이다. 이 다툼을 어떻게 건설적인 다툼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 바로 진보-보수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하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위한 자세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진보와 보수의 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좌파와 우파의 차이에 대해 알아야 한다.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 대혁명 때 열렸던 국민의회에서 유래하는데 왼쪽에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공화파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쪽에는 왕정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왕당파가 앉았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열렸던 국민공회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서민들을 대신해 급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자코뱅’이 좌측에 앉았고, 부자 계층을 대표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는 ‘지롱드’가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대체적으로 좌파는 급진개혁, 사회주의, 농민과 노동자, 빈민 등을 대변하고, 우파는 온건개혁, 자유주의, 자본주의, 상공업자, 부자 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좌파와 우파는 정치성향을 의미하며 진보와 보수는 이런 정치성향을 실천하는 행동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진보는 현재 체제를 바꾸고 개혁해 나가자는 의미기에 좌파와 거의 뜻을 같이하고, 보수는 현재 체제를 지키자는 의미기에 우파와 뜻을 같이한다. 개념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사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는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개혁이 좌파의 주장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에서 대체적으로 진보는 좌파, 보수는 우파로 정의되므로 이하에서는 진보는 좌파를 보수는 우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다.

 

먼저 진보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진보는 미래를 중시하고 이상주의적 관점을 지향한다. 좌파는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윤리 중심(관계적 측면)의 사회를 추구한다. 범죄자와 노숙자의 원인을 사회와 경제구조에 찾으며 진보에게 자유란 권력남용이나 불평등에서의 자유를 의미하고 평등이란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후자를 조금 더 중시한다. 진보는 평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추구하며 간혹 단체를 만들더라도 집단이나 조직 보다는, ‘연대’라는 개념을 쓴다. ‘수평적 연결’이라는 인식기반을 가지기 때문이다. 진보는 시장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을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간섭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럼으로써 불평등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부를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수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보수는 과거를 중시하고 적자생존 등의 관점을 지향한다. 보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도덕 중심(내적 측면)의 사회를 추구한다. 범죄자와 노숙자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에서 찾으며 보수에게 자유란 국가에 대한 개인의 행동 범위를 의미하며 평등이란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고 전자를 조금 더 중시한다. 보수는 계급을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를 추구하기에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을 구성하며 사회전체를 공동체로 보지 않는다. 보수는 시장 원리를 신봉하며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는 개인이 부를 축적하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이로 인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남쪽은 우파, 북쪽은 좌파로 이념적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6·25 전쟁을 겪고 사람들에게 ‘좌파’는 곧 북한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을 염두에 두고 정부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좌파’,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했다. 이를 거꾸로 보아 진보 진영에서는 친일파, 독재 및 재벌 중심을 ‘우파’, ‘수구’라는 이름으로 공격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에서는 좌파나 우파보다는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 하면 흔히 반공 주의, 재벌 중심의 시장 경제 질서 인정, 강력한 대통령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보수는 자신들이 한국 경제를 세계 수준으로 일으킨 주역들이라고 평가한다. 반대로 진보는 남한과 북한의 화해, 복지 및 민주화 확대 등으로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을 말하며 자신들이 과거 권위적주의적 정치 체제를 뒤엎고 민주화를 이끌어낸 주역들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평소 비율이 진보 25 : 중도 40 : 보수 35 정도이고, 선거 때가 되면 진보 35 : 중도 20 : 보수 45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물론 지금의 시국에서는 또 다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보는 보수에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보수는 진보에게 ‘위선적’이라 비난한다. 보수가 생각하는 ‘우리’는 가족, 학교, 고향 그리고 크게는 국가까지고, 진보의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크다. 그렇기에 보수는 종종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도덕적 비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가족과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보 또한 자신의 순수함을 오도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정의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진영의 선거 현수막을 잘 보면 슬로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대체로 보수 진영의 현수막은 공약이 구체적이다. 우리 지역에 얼마를 가져다주고 일자리를 몇 개 만든다는 식이다. 진보는 그것보다 좀 더 추상적이다. 경제 민주화, 부패 척결 등의 식이다. 이렇기에 나이가 많은 유권자의 경우 자연스럽게 더 이해가 잘 가고 와 닿을 수 있는 보수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단지 박정희 향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는 복지효과가 경제를 살린다고 생각하고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는 낙수효과가 경제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양 진영의 슬로건이 반대가 되어야 맞는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남북 대립, 독재, 일제 등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기형적은 경쟁구조로 변질된 것이다(실제로 포퓰리즘 공약의 경우 오히려 보수 진영에서 더 남발하고 있다는 점과 구체적 대안 없는 추상적 메시지성 공약만 남발하고 있는 것은 진보 진영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각 사안별로 진보와 보수의 양 입장을 교차적으로 지니고 있다. ‘EBS 다큐프라임 킹메이커 2부 – 중도파는 중간에 있지 않다’에서 한 실험이 있다. 똑같은 내용을 프레임만 조금 다르게 해서 질문을 했더니 재밌는 결과가 나타난다. KTX 민영화에 대한 질문을 ‘KTX 일부 노선을 사기업에 매각하는 것에 찬성하십니까?’와 ‘고속철도의 경쟁체제도입에 찬성하십니까?’로 나누어서 질문했다. 사실 두 질문은 같은 뜻이다. 전자의 경우 반대가 월등히 많았으나 후자의 경우 찬성에 대한 비율이 전자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매우 복합적인 대응을 한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조금이라도 보수 진영의 사고방식을 지닌 진보에게 ‘회색 분자’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다. 진보 진영의 ‘순혈주의’ 탓일 것이다. 물론 ‘정통성’ 차원에서 본다면 보수 진영도 마찬가지다. 진영에 따라 상대방을 오로지 비방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진보는 지켜야할 가치와 속도를 감안하며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보수는 사회 발전을 위한 이상적 가치를 감안하며 공동체를 더 강화해야 한다.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지 중립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진보는 아직 쓸 만한 데 버리려는 고집을 꺾고 보수는 이젠 쓸모없는 데 안 버리려는 고집을 꺾어야 한다.

 

향후 보수와 진보의 경쟁은 시장 경제 질서에 대한 정의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대한민국의 방향 설정에 대한 논의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젊은 보수층이 등장할 것이며, 사회 민주주의 사상으로 선회한 중년 진보층이 등장하여 새로운 경쟁 구도가 나타날 것이다. 양 진영의 건전한 경쟁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부패 척결과 합리적 정치 구조의 개편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의 진영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상대 진영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단단한 보수가 버티어야 예리한 진보가 탄생할 수 있다. 상상해보라. 대한민국이 보수 일색이거나 아님 진보 일색으로 변한다는 것처럼 한국 정치 역사에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고양이 목에 방울을 함께 달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제는 방울의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남았다. 더 이상 정치인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자각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조지형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전)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도서출판 큰글사랑 기획실장

주식회사 디엠에코 이사

『어쩌면당신은관심없는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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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2016-12-24 18:53:01
기대만 하고 사는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라는 말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