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오스 유학기
나의 라오스 유학기
  • 문선화
  • 승인 2017.07.24 18:5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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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수파노봉대학교 관광경영학과 3학년 김진호

 라오스로 오기 전의 과거를 떠올리면 깜깜한 어둠 속에 있던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증오로 가득 차 있던 19살의 소년. 수능을 몇 개월 앞두고 있던 그 때도 이미 학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 환경은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조차 없었고, 가족도 없었다. 절망감에 매일 울고 또 울었지만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단칸방은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고 나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밖을 떠돌 뿐이었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뿐이었다. 살아야했다. 도망쳐서라도 살고 싶었다.

 어머니께 다른 나라로 떠나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넉넉치 않은 상황에 가능할 리 없는 일이었지만 처음 입학금만 손을 벌리고 그 후엔 내가 어떻게든 충당할 계획이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생계 수단인 모든 것을 정리하더라도 내 유학 자금을 마련해 주시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그냥 나를 살리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후부터 스웨덴, 싱가포르, 영국 등 떠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알아보았다. 어머니는 자식을 낯선 땅에 보내려니 걱정된 마음에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셨고, 지인을 통해 라오스에 계신 교수님을 소개받았다. 나는 내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고, 그렇게 라오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라오스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한 선교사분의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남의 집에 머문다는 것이 영 불편했다. 너무나 좋은 분들이라 혼자인 날 잘 챙겨주셨지만, 마음속에 반항심이 가득했던 나는 행복한 다른 가족을 보는 것도 불편했고 신경 써 주시는것도 괴로웠다. 점점 나 스스로를 더욱 외롭게 고립시켜 버렸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왔지만 내 마음처럼 쉽게 되는 일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국립수파노봉대학교 관광경역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낯선 사람들 틈에서 그나마 준비했던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아 기본적인 의사 소통조차 되지 않았고 당연히 학교 수업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마디조차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출석만 할 뿐, 매일이 고통이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던 길, 루앙프라방 공항 근처에 혼자 앉아 떠나는 비행기를 보며 생각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다시 돌아가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낯선 땅 공항에 혼자 외롭게 앉아 막막한 시간을 보낸 뒤엔 결국 집에 들어와 책을 잡았다. 나도 노력하면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2학년에 올라가기 위해선 학점 4.0 중 2.0을 넘어야 했는데 라오스 초등학생 이하의 언어 실력을 가진 내게 2.0의 벽은 너무나도 높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일을 악착같이 공부 했다. 수업 시간에 전혀 들리지 않던 라오스어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2.1, 2.3 노력하는 만큼 점점 높아지는 성적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점점 성장하는 스스로를 보게 되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도 무언가를 하니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곳에서 2학년까지 힘든 학업을 마무리하고 2년을 더 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하는데 졸업하고 늦은나이에 가면 더 힘들 것 이라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 때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라오스에서 2년동안 있는 동안  2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짧지 않은 시간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독도 경비대에 지원을 했다. 그렇게 라오스에서 2년의 시간을 정리하며 다시 라오스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집안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과 군대, 학업 모든 것이 벅찼다. 그렇게 또 한번 멀리 떠난 나는 독도에서 군대 생활을 하며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거라 다짐했던 라오스라는 땅과 라오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생각이 났다. 밤하늘에 별과 바다뿐이었던 독도에서 자꾸 사람들 생각이 났다. 미성숙했던 나와 함께 해줬던 사람들이.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방황하는 중학생 소년과 같았다. 반항심에 삐뚤게만 사람들을 대했는데, 돌이켜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진심으로 대해 주었는지 느껴졌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던 나는 사람들이 내게 준 진심과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제서야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라오스에 가기 전의 나와 돌아온 내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그 때가 되서야 깨달았다. 전역 3개월 전까지도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라오스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라오스의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내가 가야 할 곳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전역 후 나는 ‘돌아가서 이번엔 멋진 인생 살아볼래’ 스스로 다짐하고 다시 라오스로 향했다. 하지만 다시 라오스로 돌아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 관련 서류와 비자 등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내 힘으로 다시 시작하겠다 다짐했다.

 비자를 비롯 학교 서류 등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아서 업무와 학업은 정말 힘이 들었지만 라오스 친구들은 달랐다. 내가 대학교 내 유일한 외국인 유학생이라 그런지 가는 곳마다 라오스 친구들은 나를 환대해 주었다. 하루는 라오스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보통 한국인들은 라오스에 후원과 원조를 통해 자신들을 도와주려 하는데, 우리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친구 사이라고 했다. 나는 순간 멍 했다.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한 와중에 라오스 사람들이 우리보다 가진 것 없고,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진 것 없고 불완전한 인간인 나를 라오스 친구들은 순수하게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 관계에 계산이 없는 순수한 라오스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라오스 친구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 학교가 끝나면 메콩 강가에서 꼬치를 먹고, 강가의 석양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인 삶을 산다. 나 역시 한국에 있을 때는 학교, 학원, 공부 등 당장 눈앞의 것만 볼 수 있었고 여유라곤 없었는데 라오스에 온 이후로는 길을 가며 식물도 보고, 하늘도 보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관광경역학과 3학년이 되면 모두 두세달 간 가이드센터에서 인턴을 한다. 나는 가끔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경험했는데, 외국인인 나는 라오스 친구들과 가이드 하는 방법과 제도 모든 게 달랐다. 인턴 기간 동안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학과장님을 찾아가 국립박물관에 보내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가이드 책자는 커녕 설명조차 영어로 간략히 되어있을 뿐 이마저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관광객들은 흥미를 갖지 못하고 10~15분만에 나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라오스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해주며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학과장은 나의 무례함에도 웃으면서 ‘그래, 한번 해봐’ 라며 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해 승낙해주셨다. 모든 서류 과정을 마치고 전례없이 한국인이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려다보니 더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책으로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에 2주 동안 매일 매일 박물관을 돌며 직원들을 만났다. 그 분들께 박물관에 대해 물어보며 공부하고, 라오스에 오래 산 한국 교민분들께도 물어보며 라오스의 역사와 배경 지식들을 공부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모두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고 하나씩 하나씩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늘 도움을 받아왔고 도움을 받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짧은 설명에 정말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 밥 한끼 먹자고 하던 사람들, 손을 꼭 잡아주던 아주머니 등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고 진심으로 느껴졌다. 한편, 박물관에 있다 보면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가이드들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너무나도 다른 역사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왜곡된 역사와 라오스 사람들을 비하하는 설명들을 듣고, 라오스에 대한 애정이 있고 이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화가 났다. 박물관 관장님께 정식 관광 가이드북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기존에 라오어와 영어 책자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번역이 정확하지 않았다. 관장님께서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으니 한국어 설명서를 만들어보라고 제의하셨다. 그래서 내 이름을 적은 박물관용 자료 책자를 만들게 되었고, 우선 일반 관광객들이 아닌 가이드 분들께 배포하게 되었다. 더욱 책임감을 느껴 책을 정말 많이 읽으며 공부를 했다. 혹여나 어린 내가 자료를 만들어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예상과 다르게 반응이 좋았다. 라오스 역사에 대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가이드 분도 계셨고, 자료를 잃어버렸는데 다시 받아 볼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분도 계셨다. 물론 누군가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도움이 되었다니 뿌듯했다.

 나는 지금 3.0이라는 좋은 학점으로 3학년을 마무리 한 상태이다. 이제 다신 라오스로 오기 전의 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고 수많은 좋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동행하며 응원을 해주고 있다. 누군가는 이제 졸업하고 돈도 벌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이런 나라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 또 누군가는 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 너만의 길을 걷고 있고 이후 네가 자리 잡는다면 남들은 너의 길을 따라올 거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난 삶이라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환경 때문에 나는 괴로움과 아픔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두려워 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가두는 아이였다. 나의 감정과 가정 환경을 숨기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나에 대해 인정하고 알게 되면서 남에게도 내 상처를 보여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알게 되었다. 마음을 열고 난 뒤에서야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라오스 사람들을 비롯 모든 사람들을 더욱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 같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앞에 아무것도 없다고도 말하지만, 누군가가 걸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닌가? 나 역시 보이지 않는 길이라 때로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내 나이는 이제 만 24세,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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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2017-07-26 14:01:09
열심히 사는 당신을 응원해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나아가길

ㅇㅇ 2017-07-25 21:51:28
잘 읽었습니다 어둠을 해치고 스스로 걷고자하는 젊은이의 열정이 느껴지네요

김민수 2017-07-25 18:46:45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10대 때 방황 그로인한 기회, 20대의 고민과 성장이라는 부분이 저에겐 와닿았습니다. 저 또한 그런 10대때의 방황이 있었고 20대 때의 고민이 있었지만 작성자님과 다르게 방황은 방황으로 끝나고, 고민은 고민으로 끝났습니다. 모든 "행동"으로 실천하신 모습에 저는 배웁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계시는 모습이 다른이에게는 영감이 될것이고, 새로운 시각이 될것입니다. 힘든 타지생활이시겠지만 더 파이팅 하셔서 좋은 결과 얻어 세계로 나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