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계절 -이병률-
일말의 계절 -이병률-
  • 이희제
  • 승인 2016.11.0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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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단평 -강희안- 사진 -이종성-

일말의 계절

              -이병률-

 

아무도 밟지 말라고 가을이 오고 있다
무엇이든 훔치려는 손을 내려놓으라고 가을은 온다
힘 빠지는 고요를 두 손으로 받치듯
무겁게 무겁게 차오르는 가을

가을이 와서야 빨래를 한다
가을이 와서 부엌 불을 켜고 국수를 끓이다가
움켜쥔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먼 길에서 돌아와 듣는 오래전 남겨진 메시지
우편물이 반송되었으니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마련할 것이 없었으므로
생의 단 한 번 우체국을 찾아 보낸 것이 있었다
계절이 오는 것을 다 받아내지 못하는 우체국으로
보낸 것이 되돌아 왔다

되돌려 받기를 잘했다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허공을 보냈다
파는 것인지 가져가라는 것인지 길 앞에 쌓아 놓은 가을 낙과를
하나쯤 가져가도 좋겠다

 

 

【단평】

화자가 보낸 편지는 늘 주소지 오류이거나
수취인불명의 상태로 현존한다.
타는 기다림과 지독히도 그리운 사연 대신
화자는 허공을 담아 보낸다.
소통불능이라는 바람의 문장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무엇이든 훔치려는 손을 내려놓으라고 가을은 온다."
화자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대상과 쉽게 교응하지 못하는 정황이기에
더더욱 애착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늘 비켜 지나가는 존재이기에
“움켜쥔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기도 한다.
그래서 화자가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 와서 듣는 메시지는
“우편물이 반송되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화자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발송한다.
다시 되돌아오는 계절처럼 반송될지언정 쓸쓸한 편지를 부친다.
긴 여행에서 되돌아 왔을 때, 수북이 쌓인 편지를 보며,
화자는 또한 답장을 받지 못하는 바람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그리하여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허공”을 보냈으니
“되돌려 받기를 잘했다”라고 스스로 수긍할는지도 모른다.
주체와 객체 역시 확고한 경계를 만들 수 없는 지점이다.
여기서 화자는 가을 낙과는
“파는 것인지 가져가라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상징을 만들어 낸다.
“하나쯤 가져가도 좋겠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
생이라는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강희안)

 

강희안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강희안(姜熙安) 1990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으로 등단.


시집 -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
       - 거미는 몸에 산다
       - 나탈리 망세의 첼로
       - 물고기 강의실 등

논저 - 석정 시의 시간과 공간 
       - 새로운 현대시작법
       - 고독한 욕망의 윤리학
       - 새로운 현대시론 등

공저 - 현대문학의 이해와 감상,
       - 문학의 논리와 실제,
       - 『유쾌한 시학 강의』

편저 - 『한국 시의 전당 헌정시 100선집』 

현재 계간 『시와미학』 편집주간 및 배재대 교수

사진가 - 광걸(光杰) 이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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